매월당기념관을 가다...

2009. 3. 29. 21:40강릉이야기

선교장에서 경포호 쪽으로 100여 미터쯤에 매월당기념관이 있다.. 여러 차례 앞을 지나갔지만 방문해보지는 못했는데 오늘 선교장 방문길에 찾아가 보았다..기념관장으로 보이시는 어르신이 김시습의 작품설명과 매월당에 대한 설명을 자세히 박력있게 하시는걸 볼수 있다..누구나 설명을 요청하면 즐거운 맘으로 흔쾌히 설명에 응하시는 어르신이다..혹 강릉을 방문하시고 선교장을 방문하시면 생육신의 한분이신 매월당 기념관을 방문하시어 관장 어르신의 매월당 강의를 들으시면 좋을듯 합니다.. 

김시습을 위키백과에서 찾아 봤습니다.

5세 때 이미 《중용》 《대학》에 통하여 신동이라는 이름을 들었다. 집현전 학사 최치운(崔致雲)이 그의 재주를 보고 경탄하여 이름을 시습(時習)이라 지어 주었다. 어린시절 세종대왕이 문학에 재능이 있는 그에게 비단을 선물하자, 비단들을 묶어서 가져갔다는 이야기가 있다.

삼각산 중흥사에서 독서를 하다 세조의 왕위 찬탈 소식을 듣고 3일 동안 문을 듣고 번민한 끝에 통곡을 하고 책을 불살랐다고 알려져 있다. 머리를 깎고 21세에 방랑의 길에 들어서, 양주(楊州)의 수락(水落), 수춘(壽春)의 사탄(史呑), 해상(海上)의 설악(雪岳), 월성(月城)의 금오(金鰲) 등지를 두루 방랑하면서 글을 지어 세상의 허무함을 읊었다. 31세에 경주 금오산에 도착하였다. 47세에 안씨의 딸을 맞아들여 아내로 삼고 유학자를 만났을 때는 불도를 말하지 않았다. 세조 때에 변절하여 6신(六臣)을 고한 영의정 정창손을 길에서 면박을 준 일이 있었다. 세상 사람들은 모두 그와 사귀기를 두려워하였으나 종실(宗室)인 이정은(李貞恩)과 남효온·안응세(安應世)·홍유손 4명만은 시종 변하지 않았다.

상처한 후 재취하지 않았고 홍산(鴻山)의 무량사(無量寺)에서 사망했으며 그의 유언대로 절 옆에 묻었다가 3년 후에 파 보니 얼굴이 산 사람과 같았다 한다. 뒤에 부도(浮屠)를 세웠다. 선조는 이이를 시켜 시습의 전기를 쓰게 하였고, 숙종 때에는 해동의 백이(佰夷)라 하였으며 집의의 벼슬을 추증, 뒤에 중종은 이조판서를 추증하고 시호를 내렸으며, 효온과 함께 영월 육신사에 배향되었다.


매월당기념관 전경


매월당 초상화

매월당기념관에 전시된 각종 고서입니다

매월당의 부조..(사진으로는 부조로 보이지만 사실은 음각화 형태로 되어있음...)

기념관에 게시된 매월당의 소개글

매월당이 세살때 지은 시랍니다.



매월당 사당이라고 합니다..

찾아가시는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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