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균허난설헌 기념관

2009. 3. 15. 14:57강릉이야기

허균허난설기념관은 생가터 남서쪽 100여 미터 지점에 있다. 기념관엔 허균과 허난설의 작품 세계와 허균의 가계도 소계 영상을 상영하며 각종 자료들을 전시 해 놓았다. 
입장은 무료며 매주 월요일은 휴관 합니다.

 
허씨 5문장가 시비

허씨5문장가 시비이며 초당동에 산재해있던 시비를 기념관 건립으로 한자리에 정렬해 놓았습니다.
 
 
                     경포호정자

                                 교산 허균
연기안개 푸른데 호수 빛 넘실거려
가을 꽃 발고서 죽방으로 들어가네
머리 희고 팔 년 만에 다시 와보니
그림배에 홍장 싣고 갈 뜻이 없구나
                                엄 창 섭 역
  죽지사.3
                        
                          난설헌 허초희
나의 집은 강릉  땅 돌 쌓인 갯가로
문 앞의 강물에 비단 옷을 빨았어요
아침이면 한가롭게 목란배 매어 놓고
짝지어 나는 원앙새만 부럽게 보았어요
                                장 정룡 역
 
 
   난하에서
                          
                         하곡 허봉
고죽성 마루에 달 떠 오르려 하니
난하 서쪽 성에 종소리 들리어라
조각배로 건넌지 못해 해안가 찾으니
수목이 푸르게 덮힌 곳 엣북평이구나
                                  장정룡 역
 밤에 남루에 올라
                           
                              악록 허 성
절간에 해 저물어 沙門에 의지하니
어두운 깊은 골짝에 밤빛이 짙어가네
멀리 외등불이 가물거리는 곳
江 건너면 광늘촌이 그 곳임을 알겠네
                             이 동철 역
 
 고성의 해산정에서
                                      초당 허엽
들리는 말에는 새로 좋은 터전을 마련해서
영동의 한 모퉁이에 현판을 높이 걸었다지
하늘이 아끼고 땅이 감추었던 곳에 우뚝 솟아나서
어떤 사람이 시흥에 겨워 어찌할 줄 모르고 있나.
                                         이 동철 역
 
허균이 말하는 허씨 5문장가



가계도

양천 허씨는 가락국의 김수로 왕과 보주태후 허황의 왕비로부터 비롯되었다. 양청 허씨의 시조는 김수로왕비의 30대손인 허선문이다. 그는 고려의 태조 왕건을 도와 그 공으로 공암 촌주로 봉하여, 관직을 공암 허씨로 한 것이다. 후에 공암이 양천으로 고쳐짐에 따라 양천허씨로 불려지게 되었다. 초당 허엽은 조선 선조 때 동인의 우두머리가 된 인물로 슬하에 첫째 부인 청주 한씨 몸에서 두 딸과 허성을 두었고 처째 부인 사별 후 정실로 들어온 강릉 김씨의 몸에서 세 자녀를 두었으니 허봉,허난설헌, 허균이 있었다. 이들 모두 학문과 시문에 뛰어나 허씨5문장으로 이름을 떨쳤다.

허균 허난설의 호칭에 얽힌 사연


허균허난설헌의 학통

어린시절부터 장차 훌륭한 대문장가로서의 소질을 발휘했던 허난설헌과 허균, 이들 남매는 오빠이자 형이었던
허봉에게 학문적 영향을 받았다. 당시 여성으로서 학문을 하지 못했던 허난설헌은 오빠 허봉의 도움으로
배울 수 있었고 허균은 둘째 형 허봉에게 고문을 익혔으며 뒤에 영남학파의 거두 유성룡에게 글을 배웠다.
무엇 보다도 허난설헌과 허균 남매의 일생에 중요한 영향을 끼친 수승은 서얼 출신으로 삼당파 서인의 한사람인 이달이었다. 이들 남매는 신분제도의 모순과 유교사회의 행동규범을 비판했던 손곡 이달의 사상을 고스란히 채득하고 있었다.

조선시대는 딸들에게 글을
가르치지 않던 시대였지만.
오빠 허봉은 동생 난설헌을 위해 친구
손곡 이달에게 시를 배우도록 해주었다.
당대 최고 시인이었던 손곡 이달은 서얼로 태어나 당시
사회제도적으로 배슬길에 나갈 수 없었고
떠돌이 생활을 했으며, 틀에 박히지 않는 당시풍의 글을 썼다.
허난설헌은 이달에게서 자유분방한 성격을 지닌 당나라 시의 영향을
크게 받았으며, 당시 여성으로 체험할 수 없던 사회현실을 직시하는
눈을 키웠다.
낭만시 대표작 채련곡의 정서와 넘치는 사랑은 허난설현의
여성적인 섬세한 감정을 가장 아름다운 언어로 담아 내고 있다.

허균의 삶
허균은 황해도 도사라는 높은 벼슬을 받게 되지만 이때부터 파란만장한
벼슬살이가 시작되었다. 오십 평생 여섯번이나 벼슬에서 쫓겨나고, 세번의
유배생활을 하며, 파직과 복직을 반복했다.
성리학 이외의 다른 학문이나 사상이 설 자리가 없었던 조선시대에 사회의
규을을 무시하고, 사명대사나 서산대사등의 승려들과 가까이 지냈고, 중국에
사신으로 세차레 다녀왔고, 천주교 서적을 들여와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이며
자유 분방한 삶을 살았다. 이후 형조참의와 좌참찬 등 높은 벼슬을 역임하였
으나 기준격의 상소와 이이첨의 흉계에 의해 끝내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 했다.
기존의 사회윤리에 구속받지 않은 자유로운 삶과 새로운 개혁사상의 실천을
추구했던 그 였기에 조선 사대부들에게 이단아로 취급당했다.
불여세함의 풍운아 허균은 주변을 의식하지않고 자신의 감정에 충실하면서도
모든 종교를 초월하는 거림낌 없는 자유인이였다.



최초의 한글소설 홍길동전


※ 찾아가시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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